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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도의 러시아 술 보드카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고 혀를 꼬부라지게 하고 엉덩방아를 찌게 했다
선학역에서 만나 산으로 오르기 전 현선배가 말한다.
"고량주 준비했어? "
"아니"
"산행인은 미리 다 준비를 해야 하는데.. ㅎㅎ"
우리는 역을 나와 산으로 올라가면서 편의점에 들른다.
"아주머니 고량주 있나요?"
"네, 있어요"
"음, 편의점에도 고량주가 있네, 하나 살까? 저번에 오선배님이 준 그 고량주 가격과 비슷하네"
"보드카도 있네..."
"이거 센 거야. 러시아에서도 알아주는 거지" 현선배가 말한다.
고량주를 사려고 하는 데 대관이가 내 옷자락을 끌며 말한다.
"집에 보드카도 있고 고량주도 있어 올라가면서 잠깐 들러서 내가 가져올게... 여기서 사지 마."
라며 작은 소리로 말해준다.
"어, 그래? 그럼 여기서 안주로 새우깡이랑 오징어 땅콩을 사고 술은 네가 가져오는 걸로 하자 "
하고 편의점을 나와 산 쪽으로 향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관이를 잠깐 기다리며 해가 비치는 곳에 서있었다.
잠시 후 대관이가 나온다.
"가자구 "
문학산 옆길로 오르며 이 얘기 저 얘기
"땅이 질어. 조심해 걸으라고.."
봄이 오는 모양이다. 땅이 질다.
조금 올라가는데 산 중턱에서 어느 중고등학교 동창회가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시산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시산제를 하는구먼, 벌써 그럴 계절이 되었네.
현선배 시산제는 산정상이 보이는 데서 하는 건데.. 하며 시산제의 규칙을 알려준다.
"허, 그래요?"
우리는 조금 더 올라가서 벤치가 있는 곳에 앉아 보드카를 꺼냈다.
빈속에 한잔씩 드링킹!
속이 짜르르르 하게 울려오는데
거기에 새우깡과 오징어 땅콩을 한입 넣으니 맛이 괜 찮다.
깔끔한 러시아의 술맛. 주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시베리아의 겨울을 상상케 했다.
잔설을 보며 마시는 좀 센 술...
조금 있으니 머리에서 신호가 온다.
몽롱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
이때 우리 가까이로 두 여성 이 애완견을 데리고 올라온다.
"오, 치와와네요.."
"네"
"이름이 뭐예요?"
"하얀 놈은 멸치, 까만 놈은 꽁치예요."
"치자 돌림이네요, ㅎㅎㅎ"
하얀 치와와는 우리 집 견공과 코부분만 빼놓고는 거의 똑같이 생겼다.
멀리서 보면 우리 집 견공인 줄 알겠다.
나는 반가워 새우깡을 들고 가 하얀 치와와에게 준다.
요놈 먹진 않는다.
나는 이름이 재미있어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한다.
우리는 다시 보드카를 한잔 더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선배 은근히 잘 들이킨다. 응? 술맛이 괜찮은 가 보다?
내가 두 잔 할 때 네 잔은 마신 것 같다.
ㅎㅎ 오늘 재밌겠는데... 산행의 끝이 기대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소주에 1차만 하고 바로 집으로 가버리는 오선배
소주가 약해서 그런걸까?
이럴 때는 독한 술로 처음부터 마시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산에서 마신 보드카에 식당에서 마신 소주에...
서서히 취기가 올라 혀가 꼬부라졌는데
오늘은 식사가 끝나갈 즈음 말이 많아졌다.
음. 역시 보드카의 위력이 나타나는군. 집에 가겠다는 안내 방송이 없다 .
ㅎㅎ 제대로 걸렸군. 요즘 우리 소주는 배만 부르단 말이야.
나도 다시 남은 보드카를 마시니 말이 더 많아진다.
그리고 소주 한 병에 안주도 하나 더 시켰다.
회와 튀김과 매운탕도 다 먹고...
이젠 다시 술이 좀 깬 후에 가야 될 것 같았다.
오선배님 혀가 보통 꼬부라진 게 아니다
커피숍에서 자리에 앉는데 의자에 잘못 앉아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이구 일으키는데 몸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ㅋㅋ
수다를 떤다.
나무이야기, 여행이야기, 정치이야기,...
제주도여행을 한번 가자고 대관이가 말한다.
그거 좋지. 언제가 좋을까? 5월, 11월.. 기차를 타고 목포까지 가서 배를 타고 가는 것 어때?
차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가는 기차여행, 바다 냄새를 맡으며 가는 배여행.
제주도에서는 영실 등반.. 나지막한 오름 등반...
한번 해보자고 누구 한두 명 더 가면 좋을 듯한데 누가 좋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선배 발음이 서서히 되돌아온 듯하다.
흠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아. 발음이 되돌아왔어.
"커피 잘 마셨어요."
"우리가 너무 떠들었죠?"
"아네요."
2월의 만남
봄이 오는 길목에서
진흙을 밟으며 오른 산길
보드카에 열 오른 오후 대화
오선배가 집에 갈 생각을 못하게 만든 보드카
보드카의 위력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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